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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학문세계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일

나는 함께 하는 일에서는 어리석고 어설픈 점이 많았지만, 뜻으로는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마음에 두고 있었던 점을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다.
공부하는 일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가 쓸모 있는 일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통해서 나를 쓸모 있게 만드는 일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공부로써 얻은 쓸모를 나만 따로 쓰는 것보다 남과 함께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과 중심의 공부보다 스스로 궁금한 것을 묻고 따지는 생활 중심의 공부가 더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무엇이든 스스로 찾아서 묻고 따져서 푸는 일과 깨치고 익혀서 배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공부는 나에게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는 것으로서 가장 즐거운 일로 자리하게 되었다.
교육하는 일
나는 1974년 2월에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하면서 1974년 4월부터 1980년 2월까지 6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1982년 2월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1982년 3월부터 2017년 2월까지 35년 동안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교원으로서 41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을 했다. 나는 학교를 밥벌이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학생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 많다.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서 넉넉함보다 모자람이 많았고, 즐거움보다 아쉬움이 컸다.
연구하는 일
나는 1972년에 대학에 들어가자 묻고 따지는 일에 재미를 붙여서 갖가지 책을 찾아서 읽었다. 1974년에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는 가운데 1975년에 건국대학 이부대학에 들어가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1978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나는 개념을 다듬어서 이론을 만드는 연구자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가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일은 내가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모든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 어떤 일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나 는 1980년 한국학대학원에 들어가서 한국학을 공부하게 되자 꿈에 그리든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온 심정이 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쏟아붓게 되었다. 나는 연구자로 살아가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아부은 결과로 사회, 심리, 교육, 문화 따위에 걸쳐서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83년 3월에 한국항공대학에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자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 위해서 나를 연구자의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일을 했다. 연구자의 섬은 나의 머릿속에 자리한 섬으로서 오로지 묻고 따져서 깨치고 익히는 일만 할 수 있는 외딴 곳이었다. 나는 나를 연구자의 섬으로 유배를 보낼 때, 호를 ‘일헌(逸軒)’으로 지어서 섬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공자가 “逸民은 伯夷, 叔齊, 虞仲, 夷逸 따위를 일컫는다.”라고 말한 것에서 ‘逸’을 따다가 나를 ‘逸軒’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나이가 쉰여덟인 2009년에 이르러 학문이 넉넉하게 익었다고 보아서 나를 유배에서 풀어 주었다. 그런데 나의 학문이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2년 뒤인 2011년에 다시 나를 연구자의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나는 2019년에 한국말 말차림법을 완성하게 되자, 머릿속에 자리한 연구자의 섬을 허물어버리고 나를 유배지로부터 완전하게 풀어주었다. 나는 내가 만든 연구자의 섬에서 32년 동안 자잘한 외로움과 호젓한 씁쓸함을 벗삼으면서 즐거움과 놀라움으로 가슴 부듯한 나날을 살았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갈 수 없다.
봉사하는 일
나는 공부와 교육과 연구를 내가 남을 위해서 남과 함께 하는 일로 삼아왔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내가 깨치거나 깨달은 것이 언제나 남과 함께 하려고 했다.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자 대학의 밖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1985년 12월에 연신서당을 열어서 곳곳의 인재를 한 곳에 모아서 함께 공부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나는 연구자모임을 통해서 함께 하는 일도 했는데, 조선사회연구회, 한국인격교육학괴, 교육사학회,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통해서 함께 하는 일을 했다. 문화와 사람, 사이와 같은 잡지를 만들어서 함께 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인터넷시대가 되면서 유튜브를 찍어서 함께 하고, 페이스북에 글을 써서 묻따풀 학당을 열어서 많은 이들과 함께 하고, 얼굴을 맞대고서 묻고 따지는 공부를 함께 하는 묻따풀 강학회를 시작하였다. 사단법인 한국인문학연구회도 시작하게 되었다.